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장애시민이 있다
광장으로 나선 ‘못된’ 장애인 변재원의 시민권 투쟁기
지체장애인이자 인권활동가, 소수자 정책 연구자로서 새로운 세대의 장애운동 가능성을 보여준 활동가 변재원이 500여일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정책국장으로 활동한 이야기를 쓴 책 『장애시민 불복종』이 출간되었다. 한 개인의 투쟁기이자, ‘불복종’을 택한 장애시민들의 사연을 동료 시민들에게 전하는 대국민 해설방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전장연의 투쟁이 하나의 논쟁이 된 지금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사회운동과 인권투쟁이라는 낯선 세계를 만나며 이질감과 갈등을 겪었지만, 현장의 경험과 대화를 통해 투쟁과 시민적 권리를 새롭게 인식하고 동료들의 대의에 공감하며 운동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자꾸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장애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으로 인한 출근길 갈등에 환멸이 난 독자라면 당장 일독을 권한다. 솔직하고 간절한 변재원의 고백에 웃고 울며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이 사회를 보는 당신의 눈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우리만 조용히 있으면 모두가 평화롭다니,
그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할 소리인가요?
사람을 좋아하는 ENFP이자 합리적인 행정학 연구자인 변재원은 대체 어쩌다가 ‘시민 불복종’을 택해 ‘데모꾼’이 되었을까?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의료사고로 척수 공동증이라는 희귀병을 얻은 후천적 장애인이다. 남들처럼 살기를 바랐을 뿐인데 이 사회에서는 지체장애인에게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사회의 불합리함을 평생 느꼈지만 ‘레드 콤플렉스’가 있는 집안 배경과 인정받고자 하는 성격이 반항을 가로막았다. 차별의 경험은 체념하고 포기해야만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저자는 사회구조보다는 개인에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편이었다.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려는 ‘모범적인’ 장애인으로 살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노력을 곧이곧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열악한 접근성 때문에 학교를 자퇴해야 했고, 고작 비행기를 타려고 해도 손해배상 서약서를 쓰도록 강요받았으며, 취업과 아르바이트도 어려워 천원짜리 학생식당 밥도 먹기 어려운 빈곤을 겪었다. 어느 순간 변재원은 묻기 시작했다. 내가 조용히 있으면 모두가 평화롭겠지만, 내가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나에게도 평화일까? 그는 오랜 고민과 투쟁을 거친 후 이제 자신 있게 결론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평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으며,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며 “시끌벅적했던 모든 시간이야말로 진짜 평화의 순간”(307면)이었다고.
성공하고 싶었던 서울대생을 길바닥으로 이끈 깨달음
문제는 뒤틀린 몸이 아니라 뒤틀린 사회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탑승 투쟁이 이해되지 않는 이들, ‘투쟁’은 낯설고 두려운 것이라고만 여기는 이들, 시위는 ‘노조’ ‘빨갱이’ ‘사이비’나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 불복종이 불편한 이 사회의 ‘모범시민’들에게 변재원은 고백한다. 자신도 그랬다고. 강남역 어학원 새벽반에 다니며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에 마음 졸이며 인턴십을 해내던 시절 그의 모습은 여느 평범한 MZ세대 청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학교, 구글코리아를 거친 그의 이력은 그야말로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모범적이다.
나름대로 번듯한 일직선이었던 그의 삶에 균열이 간 것은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못된 장애인’의 대표 격인 박경석 전장연 대표를 인터뷰하면서부터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박경석의 짧고 굵은 물음에 머리를 치는 충격을 느낀 저자는 비정상성으로부터 도망치길 멈춰보기로, 자신의 몸이 아니라 세상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목표는 단순하고 거창했다. 장애인도 존엄과 평등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 전장연 정책국장 자리를 덜컥 맡은 그때부터 변재원의 인생 장르는 ‘휴먼 다큐’에서 ‘9시 뉴스’로 바뀌었다. 그는 이제 장애를 극복하고 고층 유리빌딩으로 출근하는 ‘착한 엘리트 장애인‘이 아니라 길바닥 농성장에서 시민들을 성가시게 하는 ’못된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들이 짜증나고 이해가 안되시죠?
압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장애운동에 입문한 ‘초보’ 활동가 변재원은 낯선 현장에 적응하며 ‘탐색-직면-이해-연결’의 과정을 거친다. 비장애중심주의에 균열을 내는 활동에는 많은 난관이 있을 뿐 아니라,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야 한다는 잠재적 위험까지 있었다. 한강대교를 기어서 횡단하고, 서초동 가파른 언덕길을 휠체어를 굴려 기어코 올라가고, 뜨거운 버스 엔진 밑에 들어가 눕는 활동가들의 거침없는 활동에 저자도 처음에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투쟁’의 이유를 알자 그들의 진면모가 보였다. 장애운동 활동가들은 자신은 다니지도 못했던 학교에 더 많은 장애인이 다닐 수 있도록, 희귀병에 걸린 친구가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도록, 전염병이 퍼진 병동에 갇혀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장애인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인생을 건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변재원은 시민의 권리, 국가의 역할 등 행정학 교과서에서나 나오던 용어들이 현실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깨우쳤다. 덕분에 “장애인들이 왜 법을 어깁니까?”라는 라디오 진행자의 질문에 당당하고 겸손하게 답할 수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행하는 법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야”(226면) 한다고. 시민 불복종의 형태를 한 장애운동으로 불편을 겪은 시민들이 함께 인내하고 목소리를 내준 덕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저상버스가 도입되고, 한국 사회가 바뀌어가고 있으니, 시민들께 감사하다고.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질 것인가?”
이번에는 지더라도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믿음
변재원은 자신의 두려운 마음과 부족함을 고백할 때 놀랍도록 솔직하다. 또 그는 자신의 심경을 변화시킨 것들을 기록하는 일에 집요하다. 동료의 말 한마디에 깊이 감동하고 타인의 고통에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가 내뿜는 서투르고도 뜨거운 열정은 사람들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김승섭, 홍은전, 김원영은 입을 모아 말한다. 변재원이 써내려간 500일간의 전장연 활동기는 치열하고, 평화롭고, 솔직하다고.
변재원의 활동 장면 곳곳에는 그를 이끌어준 동료들의 말이 새겨져 있다. 장애인에게 계단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27면)과 같다는 깨달음을 준 박경석, “투쟁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143면)라고 외치는 강인함을 보여준 이형숙, “아버지가 돈이 없어 못 고쳐준다고”(172면) 했던 사연을 전하며 아픈 몸과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는 용기를 전해준 노금호 등. 변재원의 전장연 활동은 패배투성이었고 때로는 ‘내 세대에는 도저히 끝나지 않겠다’는 절망감을 주기도 했지만, 이런 동료들 덕분에 굴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변재원은 장애인 인권을 위한 투쟁이 이 사회의 벽 앞에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할지라도 그다음을 기약하며, “어떻게 질 것인지”(256면)를 고민하는 활동가로 성장했다. 이처럼 변재원이 경험한 ‘못된 장애인’들의 운동판은 예상외로 누구보다 멋지고 단단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변재원과 동료들이 온몸으로 실천해온 연대의 가치는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추모가 일상이 된 한국 사회에서 우리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다.
목차
프롤로그
1부 탐색의 순간
-데모는 왜 하는가 1
삶과 죽음의 경계선
쿠오 바디스 도미네
코호트 격리
도망칠 권리
2부 직면의 순간
-데모는 왜 하는가 2
허니문 기간
표준이 아닌 말들
아버님 전 상서
투쟁입니다, 투쟁
수감의 이유
3부 이해의 순간
-데모는 왜 하는가 3
돈이 없어 못 고쳐준다고
직접 물어보시겠어요
우리 오래 함께합시다
두렵지 않으세요
4부 연결의 순간
-데모는 왜 하는가 4
어떻게 질 것인가
예술과 활동은 닮았다
평가의 언어, 비난의 언어
고맙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에필로그: 시끌벅적한 모든 시간이 평화의 순간이었다
김원영 작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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